Heroine of Life

10여 년간 국립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로 활동한 윤혜진. 지난해 <푸에르자 부르타> 공연에서 다시 한 번 존재감을 입증한 그녀는 인생의 새로운 무대에 올랐다. 일과 가정, 춤과 패션을 넘나드는 아티스트 윤혜진의 완벽한 공연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ART AND LIFE

윤혜진은 발레 애호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두각을 보여준 무용수다. 유년기 심장이 약해 의사로부터 운동을 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권유를 받아 13세에 발레를 시작한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동양인 최초로 미국의 스쿨 오브 아메리칸 발레 학교에 입학했다. 무용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에는 학생 신분으로 국립발레단 단원에 발탁되며 이후 10년 동안 수석 무용수로 활동했다. 알려져 있듯 그녀는 원로 배우 윤일봉의 딸이다. 오랜 시간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구축하며 배우이자 아티스트로 살아온 아버지를 보며 그녀는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예술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체득하며 자라왔다. 연약하던 유년 시절의 윤혜진은 발레를 만나고 꿈이 생겼다. 첫사랑에 빠지듯 무용에 몰입한 소녀는 타고난 재능에 근성, 열정을 더해 스스로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두었다.
국립발레단의 톱 발레리나로서 정상에 있던 그녀는 큰 도전을 한다. 2012년 국립발레단을 나와 목표로 삼았던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에 들어가 모던하고 세련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간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 등 클래식 발레 무대를 섭렵하며 주역으로서 클래식 발레를 충분히 경험했기에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인생은 발레처럼 드라마틱했다. 모나코에서 활발히 활동을 하던 중 예상하지 못했던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치료 차 한국에 돌아오게 된 그녀에게 운명 같은 짝이 나타났고, 그렇게 결혼과 출산을 자연스럽게 지나 왔다. 예술의 길 위에서 모든 시간은 경험과 영감이 되었다. 지난 2013년 딸을 낳고 엄마가 된 윤혜진은 임신과 출산을 거치며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임신 후 예민해질 때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인생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동시에 예술에 대한 생각도 이전보다 분명 확장됨을 느꼈어요.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제게 새로운 자극이 되고, 인생과 예술에 대한 깊이를 알게 했죠.”
한동안 육아에 집중했던 그녀는 지난가을 또 한 번의 새롭고 과감한 시도에 도전했다. 아르헨티나의 넌버벌 쇼이자 세계적인 공연인 <푸에르자 부르타>의 러브콜을 받은 것.
“엄마가 되기 전이었다면 발레리나 출신의 무용수로서 발레 무대에 대한 고집을 버리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번 <푸에르자 부르타>의 제안을 받았을 때는 달랐죠. 내 몸짓이 매체가 되어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무대에 섰고, 예술 세계를 확장하는 또 다른 신비롭고 고마운 경험을 했죠.”

MY WORK

그녀는 무용가로서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그간 늘 관심을 가져오던 ‘패션’을 제2의 무대로 선택했다. 3년 전, 여성복 브랜드 ‘HAE146’를 론칭하고 오너 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있다. 발레리나의 패션 사업이 난데없어 보이지만 옷은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최고의 취향이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이지만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꽤나 패션에 민감한 아이였어요. 유치원에 가야 하는데 이걸 입겠다, 저걸 입겠다 고집을 한창 피우고 마음에 드는 옷을 입어야만 외출할 정도였다고 해요.”
발레를 하면서도 패션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는 꾸준히 이어졌다. 직업 특성상 해외를 자주 방문하다 보니 다양한 패션 스타일을 즐길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자신의 길고 슬림한 몸매에 어울리는 옷뿐 아니라 입고 싶은 옷을 직접 만들어 보고도 싶었다. 오너 디자이너로서 그녀는 모든 프로세스를 총괄한다. 직접 동대문 원단시장에 가서 원단을 사오고, 샘플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며, 고객들의 전화를 직접 받고 또 택배로 발송하기 전 검수까지 꼼꼼히 완수한다.
“옷을 직접 만들어보니 패션을 전공한 디자이너들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어요. 콘셉트를 잡는 것부터 라인을 만들고, 원단과 장식을 선택하는 일 등 하나의 옷이 만들어지기까지 재능과 열정, 근면함 등 많은 것이 필요하죠. 이렇게 태어난 제 옷이 소중하듯 다른 디자이너들의 디자인을 보면 절로 존중하게 돼요. 패션이란 영역 자체에 대한 존경이기도 하죠.”
그녀는 옷을 만들 때 특히 소재에 집중한다. 보통 눈에 좀 더 띄는 실루엣이나 컬러 등에서 영감을 얻을 법하지만 탄탄한 소재감이야말로 옷을 오래 입고 또 즐길 수 있는 비결이라 여긴다.
“국내산이든 수입산이든 품질과 컬러가 좋은 원단을 선택해요. 양질의 소재를 오래 만지고, 집중하다 보면 좋은 디자인이 떠오르더라고요.”
윤혜진이 만든 옷은 그녀를 닮았다. 심플하고 우아한 라인, 담백하면서도 디테일이 있는 디자인, 단단하고 부드러운 소재는 움직일 때마다 마치 춤을 추는 듯 몸짓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그녀는 남다른 철학과 디자인을 선보이는 패션 디자이너로서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옷을 만들고 싶다.

PASSIONATE MOM

무엇을 시작할 때 계획보다 영감, 그때의 감정에 더 충실한 편인 윤혜진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만나면 거침없이 빠져드는 성격이다. 그렇게 몰입한 일은 절대 대충 할 수가 없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동일하다는 것은 큰 축복이에요. 발레가 그랬어요. 지금은 무용이라는 첫 무대를 넘어 패션과 방송이라는 무대에 올랐어요. 남몰래 꽁꽁 숨겨놓은 보물처럼 나 혼자 숨겨 놓은 꿈이었는데 지금 하나씩 펼쳐가는 중이에요.”
패션 사업으로 바쁜 한편 윤혜진은 지금 디지털을 활용해 다양한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배우들과 가까이 하며 자라서인지 방송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죠. 그러다 브랜드를 론칭하기 전 SNS를 시작하며 발레리나 윤혜진을 사랑하는 팬들과 라이브 방송으로 만났어요. 디지털을 통한 소통은 제게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소탈하고 유머러스한 제 성격을 보여주기도 하고, 예술을 대하는 진지한 생각과 애정을 공유하기도 해요. 메이크업을 하거나 식사를 하는 장면도 모두 이야깃거리가 되고, 이런 소통을 통해 많은 아이디어와 즐거움을 느껴요.”
일 이야기를 나눌 때는 엄중할 정도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녀이지만 사는 얘기를 나누니 SNS와 유튜브 등에서 보여준 소탈한 성격이 금세 드러난다. 다양한 활동을 하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지만 일과 삶의 균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주중에는 일에 집중하고 주말에는 딸이 원하거나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일정 위주로 움직여요. 가족은 제게 에너지를 주는 존재죠. 흔한 말이지만 일하는 엄마라면 누구나 그럴 거예요. ‘HAE146’이라는 브랜드명도 제 이름의 한 글자에 우리 가족의 생일을 결합해 만든 거예요.”
그녀의 지극한 가족 사랑은 그녀의 몸을 둘러싼 9개의 타투로도 표현된다. 결혼하기 전까지 오후 9시 귀가가 철칙일 정도로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았던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 엄마로 살면서 얻은 자유가 즐겁다. 지난해에는 가족들과 함께 쿠바에 다녀왔다. 치안을 걱정하는 지인들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부부의 로망이던 곳이라 과감히 결정했다.
“쿠바의 다채로우면서도 빈티지한 색감이 저를 자극했어요. 올드 카와 오래되어 빛이 바랜 건물 등 지금도 기억에 선명해요. 지금은 솔리드 원단 위주로 옷을 만들고 있는데 컬러를 이용한 아이템도 만들어봐야겠다는 아이디어도 얻었어요.”
엄마를 닮아서인지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그녀의 딸 역시 쿠바에서 잘 적응하며 새로운 경험을 마음껏 즐겼다. 가족의 힘이 얼마나 큰 삶의 기쁨이자 본질인지 잘 안다. 엄마이자 아내, 무용가, 디자이너, 사업가 등 수많은 타이틀 속에서 그녀가 늘 생각하는 단어는 가족과 내 자신이다.
“책임감 대신 용기를 가져보세요. 우리에겐 가족이 있잖아요.”
Freelance Editor_ Kim Sung Sil
Photos_ Kim In Chul
Hair_ Jin Mi Kyung
Makeup_ Chun Mi Yeon(Deen)